mobile background

유신독재 시기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구속자가족협의회’는 

1976년 ‘양심범가족협의회’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남민전 사건,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등 유신독재시절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던 가족들과 

1985년 미문화원 사건,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등 민주화를 요구하다 구속된 수많은 학생들의 가족들이 모여 ‘민가협’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주로 양심수의 어머니들로 구성되어있는 민가협은 구속자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권지킴이’로 민주주의와 인권실현을 위해 싸워왔다. 민가협 어머니들이 그동안 벌여온 활동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인권이 침해되는 그 어떤 곳이라도 맨 먼저 달려가 긴급구조 활동을 벌이는 ‘인권 앰블런스’ 역할을 해온 점이다.

"가족운동, 민주화투쟁의 당사자 대신 가족이 민주화 투사가 되었다."


민가협은 창립부터 지금까지 양심수 석방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양심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널리 알린 것도 민가협이었으며, ‘양심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석방에 인색했던 정부를 강하게 규탄하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양심수를 사회문제화 시켜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양심수들이 감옥문을 열고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러한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사진 1장 없이 연고자도 없이,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 없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묻혀있던 3, 40년 구금되어 있던 초장기수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사회에 복원시켜 내면서 이들을 전원 석방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악법철폐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가 폐지되기도 했다. 특히 국정원(안기부), 경찰 대공분실, 검찰 공안부, 공안문제연구소(경찰대학 산하기구) 등 공안수사기구에 대한 감시활동과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러한 활동은 2004년 7월, 공안문제연구소 폐지를 이끌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개선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민가협 어머니들의 ‘보랏빛 수건’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민가협 주요 활동

1989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12월에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진행했다. (총 18회 진행)

1993년 9월 23일 제1회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를 시작으로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 앞에서 진행했다. 2020년 2월 13일, 1257회 민가협 목요집회를 진행한 이후 27년간 매주 이어진 목요집회는 코로나19 확산 시기 집합금지명령으로 중단되었다. 

1992년 5월, 서울대학교 축제현장에서 시작한 양심수석방 기금 마련 민가협장터는 2018년 9월까지 26년간 52회 진행되었다. 민가협장터에는 어머니들을 도와 함께한 많은 활동가들이 있었다.

1992년 7월 장기수 석방 촉구 대전교도소 집회, 1995년 5월, 법무부 방문, 영등포교도소 철망 문제, 교도소 내 구매품 제한 문제 등 교도소 처우개선 및 양심수 사면복권 촉구 활동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단식농성까지 이어가면서 교도소 처우개선과 개별/합동 면회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후 구속노동자후원회, 양심수후원회와 추석맞이 양심수 면회를 함께 했다.

1990년부터 연대농성, 헌법소원, 피해자대회, 심포지움, 테러방지법 입법저지, 집시법 불복종운동, 실테보고서, 콘서트 등의 활동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 노동악법 철폐 투쟁을 이어왔다. 그리고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 공안문제연구소(2004년) 등 폐지했다.

1999년에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를 만들고, 2000년 9월 비전향장기수 63명을 송환하는 역할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1989년 2월 21일 민가협은 고문경관 이근안을 국민이 직접 검거하자고 국민수사를 선언하며 현상수배를 하였다. 검거 의지가 없는 권력을 향한 선전포고였으며 고문 근절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후 10년, 고문수사관 2백여 명을 고소·고발하는 활동으로 1999년 10월 마침내 이근안이 자수하였다. 이근안 처벌운동은 반인도적 범죄행위인 고문 근절 및 재발 방지를 막기 위한 인권운동을 통해 고문을 사라지게 하였다.

민가협은 ‘어머니회’로도 불리며, 수요 집회, 면회 운동, 서명 운동 등을 통해 사회 여론을 형성했습니다. 민가협은 “국가폭력의 피해자 가족”이라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입법 로비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단순한 서포트 단체가 아니라 입법 추진의 주체로 참여했다.

민가협의 활동은 투쟁의 현장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 5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총 49회의 강좌를 통해 인권교육을 이어갔다. 다양한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한미 관계, 악법 연구, 검찰의 문제, 북핵 문제, 한반도 평화 등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배우고 연대하는 과정이었다.

1985년 현판식 과정에서도 경찰에게 끌려가고,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 과정에서도 경찰의 폭력에도 물러서지 않고 거세게 저항하였다. 연대활동에서도 ‘인권앰블런스’는 멈추지 않았다. 노동의 현장에도, 통일운동의 과정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와의 연대, 세계인권활동가와 함께하는 목요집회 등 국제적인 연대로 함께 했다.